사토미 요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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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토미 요시타카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사토미씨의 5대 당주이다. 1533년 이나무라의 변으로 부친 사토미 사네타카가 살해된 후 호조 우지쓰나의 지원을 받아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후 호조 가문과 대립하여 간토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며, 우에스기 겐신 등과 동맹을 맺고 항쟁을 벌였다. 1562년 아들 사토미 요시히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으나 실권을 유지했으며, 1574년 구루리 성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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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와 사토미씨 - 사토미 요시야스
사토미 요시야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와 에도 시대에 활동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받았으나 몰수당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력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 아와국 (도카이도) 사람 - 니치렌
니치렌은 13세기 일본의 승려로, 법화경 중심의 불교를 주창하며 새로운 종파를 창시하고,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사회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던 현실주의적 구원관과 실천적 신앙을 강조한 인물이다. - 아와국 (도카이도) 사람 - 와다 요시모리
와다 요시모리는 헤이안 시대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도와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하며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케닌이 되었으나, 호조 씨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 1507년 출생 - 알탄 칸
알탄 칸은 16세기 몽골의 지배자로서 투메트부를 다스리고 명나라와 교역을 시도하다 베이징을 공격하고 화의를 맺었으며, 티베트 불교를 몽골에 부흥시키고 후허하오터를 건설하는 등 몽골의 종교적,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 - 1507년 출생 - 가정제
가정제는 명나라의 제11대 황제로서, 정덕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대례의 의를 통해 생부를 황제로 추존하려 했으며, 북로남왜의 위협과 엄숭의 전횡, 도교 숭상으로 정치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단약을 복용하다 사망했다.
사토미 요시타카 | |
---|---|
기본 정보 | |
이름 | 사토미 요시타카 |
본명 | 사토미 요시타카 |
출생 | 1507년? |
사망 | 1574년 6월 19일 |
출생지 | 아와 국 |
사망지 | 아와 국 |
별명 | 곤시치로 (유아명) |
계명 | 동양원전 대소정오거사 |
묘소 | 지바현 미나미보소시 혼오리 2014-1 엔메이지 |
가문 | |
씨족 | 아와 사토미 씨 |
부모 | 아버지: 사토미 사네요시, 어머니: 사쿠마 모리우지의 딸 |
형제 | 요시타카, 가라스야마 지로의 아내, 마리야 요시노부의 아내, 겐소 |
배우자 | 정실: 나가노 노리카즈의 딸 (나가노 아키마사의 여동생]), 계실: 도키 다메요리의 딸 |
자녀 | 요시히로 (요시토시), 다카모토, 요시쓰구, 요시마사, 요시요리?, 다네히메 (마사키 노부시게의 아내), 도요히메 |
군사 경력 | |
지휘 | 구루리 성 |
전투 | 이누카케 전투 고노다이 전투 미우라미사키 전투 구루리 성 공방전 |
관직 | |
관직 | 형부 소보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
참고 자료 | |
일본어 위키백과 링크 | 里見義堯 |
코토뱅크 | 里見義堯 해설 아시카가 요시아키 해설 구루리 성 해설 |
에도가와 구청 공식 문서 | 고노다이 전투 |
도쿄만 관광 정보국 | 구루리 성 |
다테야마 시청 공식 문서 | 사토미 씨 역대 경력 |
2. 생애
사토미 요시타카는 1533년 이나무라의 변으로 사토미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 사건은 아버지 사토미 사네타카가 사촌 형제이자 본가 당주인 사토미 요시토요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1]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사네타카·요시타카 부자가 호조 우지쓰나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자 요시토요가 이에 대항한 것으로 보고 있다.[1]
요시타카는 호조 가문의 지원을 받아 가독을 이었으나, 이후 마리야쓰 가문의 내분에서 호조 우지쓰나와 다른 편을 들면서 적대 관계가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동맹을 맺고 우지쓰나에게 대항했으나, 1538년 제1차 고쿠노다이 전투에서 요시아키가 패배하고 전사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요시아키 사후, 요시타카는 구루리성을 거점으로 사토미 가문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1552년부터 호조 가문의 공세와 내부 반란으로 위기를 맞았다. 우에스기 겐신 등과 동맹을 맺고 저항했으나, 1555년에는 가즈사 서부 대부분을 빼앗겼다. 1556년에는 사토미 수군이 호조 수군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폭풍우로 인한 피해가 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1560년 우에스기 군의 지원을 받아 호조 군을 격퇴하고 가즈사 서부를 탈환했으나, 1562년 출가하여 아들 사토미 요시히로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1564년 제2차 고노다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가즈사 대부분을 잃고 아와로 퇴각했으나, 이후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1566년에는 주요 거점을 회복했다. 1567년 미후네 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가즈사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시모우사까지 진출했다.
1574년 구루리 성에서 사망할 때까지 호조 가문에 대한 철저 항전 자세를 유지했다.
2. 1. 가독 상속
덴분 2년(1533년) 7월, 사토미 가문에서 내분(이나무라의 변)이 일어나자, 호조 우지쓰나의 지원을 받은 사토미 요시타카는 중신 마사키 도키시게와 함께 가즈사에서 거병하여 사토미 요시토요를 살해하고 가독을 빼앗았다.[1] 이 사건은 요시타카의 아버지 사토미 사네타카가 사촌 형제이자 본가 당주인 요시토요에게 살해당한 것에서 비롯되었다.[1]본래 요시토요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네타카를 죽여 요시타카가 원수를 갚았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사네타카·요시타카 부자가 호조 우지쓰나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자 요시토요가 이에 대항한 것으로 보고 있다.[1] 이러한 기록의 혼란은 하극상으로 가독을 승계한 요시타카가 곧 호조 가문을 배신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후대에 날조된 것으로 여겨진다.[1]
2. 2. 호조 가문과의 항쟁
요시타카는 호조 우지쓰나의 군세를 빌려 쿠데타에 성공하여 가독을 이었으나, 마리야쓰 노부키요(真里谷信清)가 사망하자 마리야쓰 가문의 가독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에서 마리야쓰 노부마사(真里谷信応)를 지지하였다. 반면, 우지쓰나는 마리야쓰 노부타카(真里谷信隆)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요시타카와 우지쓰나는 적대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타카는 간토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우지쓰나에게 단독으로 맞서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오유미 구보(小弓公方)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와 동맹을 맺고 우지쓰나에게 대항하였다.덴분 6년(1537년), 요시타카는 마리야쓰 노부타카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이듬해(1538년)에 제 1차 고쿠노다이 전투(第一次国府台合戦)에서 요시타카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요시아키가 열세를 보이자 전장에서 이탈하여 아와로 귀환하였다. 결국 요시아키는 전사하여, 오유미 구보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죽자, 요시타카는 그의 영지였던 가즈사·시모우사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가즈사의 구루리성(久留里城)을 본거지로 하여 사토미 가문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덴분 21년(1552년)에 호조 우지야스의 책동에 의해 사토미 가문 산하의 고쿠진 영주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며, 덴분 24년(1555년)에 우지야스와 이마가와 요시모토, 다케다 신겐의 고소슨(甲相駿) 삼국 동맹이 결성되어, 후방의 걱정을 던 호조 가문의 공세로 고지 원년(1555년)에는 가즈사 서부 대부분을 빼앗겼다. 이 사태에 대해 요시타카는 호조 측에 붙은 고쿠진 세력의 저항을 진압하고 빼앗긴 영토의 탈환을 꾀하면서, 동시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을 맺고, 오타 씨(太田氏)·사타케 씨(佐竹氏)·우쓰노미야씨(宇都宮氏) 등과 손을 잡아 우지야스에게 대항하는 자세를 보였다.
고지 2년(1556년)에는 사토미 수군을 이끌고 호조 수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단, 호조 수군이 폭풍우로 침몰하거나 표류하게 된 것이 승리의 원인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우지야스가 사토미 가문의 영지로 침공해 들어오자, 요시타카는 구루리 성에서 농성하며 우에스기 군의 원군에 힘입어 대승하고, 역공을 개시하여 가즈사 서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에이로쿠 5년(1562년), 삭발하고 출가하여 가독을 아들 요시히로(義弘)에게 물려주고 은거하나, 여전히 실권은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에이로쿠 7년(1564년), 호조 측의 오타 야스스케(太田康資)가 내통에 응하여, 요시타카는 요시히로와 함께 지바 씨(千葉氏)의 중신 다카기 다네요시(高城胤吉)가 영유하던 시모우사 고노다이 성(国府台)에 침공하여 호조 군과 전투를 벌였다. 서전에서는 호조 측의 도야마 쓰나카게(遠山綱景)·도미나가 나오카쓰(富永直勝) 등을 전사시켰으나, 일시적인 승리에 취하여 방심한 사토미 군은 다음날 새벽 우지야스와 호조 우지시게의 기습적인 협공을 받아 중신 마사키 노부시게가 전사하는 등 대패하고 말았다(제 2차 고노다이 전투). 이 패전으로 요시타카·요시히로 부자는 가즈사의 대부분을 잃고 아와로 퇴각하여 사토미 가문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아와에서 힘을 기르고, 서서히 가즈사 남부를 탈환하여, 에이로쿠 9년(1566년) 말 경에는 가즈사의 요충지 구루리성·사누키 성(佐貫城) 등을 회복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즈사 북부에서 세력 경계를 유지하던 호조 가문은 사누키 성 북쪽에 위치한 미후네 산(三船山) 기슭에 요새를 지어 대항하였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8월, 요시히로가 이끄는 사토미 군은 미후네 요새를 지키는 호조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것을 안 호조 우지야스는 적남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와 오타 우지스케(太田氏資) 등을 원군으로 파견하고, 3남 우지테루(氏照)와 하라 다네사다(原胤貞)가 이끄는 별동대로 요시타카가 있는 구루리 성을 공격하였다. 요시타카는 구루리 성을 견고하게 수비하였고, 요시히로가 우지마사가 이끈 본대를 공격하여 오타 우지스케를 전사시키는 등 전과를 올리며 격퇴하였다(미후네 산 전투). 또한, 수군의 지휘를 맡은 호조 쓰나시게도 아와에 침입하려고 시도하나, 사토미 수군과의 교전에서 손해를 입고 말았다. 이러한 정세에 따라 수륙 양쪽에서 공격당할 위험을 안게 된 호조 군은 전군이 가즈사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 미후네에서의 승리로 사토미 가문은 가즈사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고, 또한 시모우사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에도 호조 가문에 대해서는 덴쇼 5년(1577년)에 요시히로와 우지마사 간의 화평이 성립될 때까지 철저항전의 자세로 일관하였다.
2. 3. 우에스기, 다케다 가문과의 관계
1537년 마리야 신타카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그러나 1538년 제1차 고쿠후다이 합전에서는 주력군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아, 결과적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가 전사하면서 관동 중앙부로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8]요시아키 사후, 사토미 요시타카는 시모우사와 카미소우에 적극 진출, 구루리 성(久留里城)을 근거지로 삼아 사토미 가문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1552년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의 책동으로 사토미 가문 휘하 국인(国人) 영주들이 이반하고, 1554년에는 우지야스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사이에 삼국 동맹이 체결되었다. 우지야스는 호죠 쓰나나리(北条綱成) 등을 파견하여 보소 반도에 침공, 가나야 성(金谷城)과 사나키 성(佐貫城)을 공략했다.[9] 1555년 카미소우 서부 대부분을 빼앗겼으나, 요시타카는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손잡고 오타 씨(太田氏) 등과 연합하여 우지야스에게 대항했다.
1556년 사토미 수군을 이끌고 호죠 수군을 격파했으나(미우라 미사키의 전투(三浦三崎の戦い)), 폭풍우로 인한 피해가 컸기에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1560년 우지야스의 침공에 맞서 구루리 성에서 항전, 우에스기 군의 원군을 얻어 승리하고 카미소우 서부 대부분을 되찾았다. 1562년 출가하여 아들 요시히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隠居)했지만, 실권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1564년 제2차 고쿠후다이 합전에서 호죠 군에게 패배하여 카미소우 대부분을 잃고 아와로 후퇴, 세력이 일시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이후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 1566년 말까지 구루리 성, 사나키 성(佐貫城) 등 잃었던 땅을 회복했다.
1567년 미후네야마 합전(三船山合戦)에서 요시히로가 이끄는 사토미 군이 호죠 군을 격파하고, 사토미 수군도 호죠 수군에게 피해를 입혀 호죠 군을 카미소우에서 철수시켰다. 이 승리로 사토미 가문은 카미소우 지배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시모우사까지 진출했다. 이후에도 호죠 가문에 대한 철저 항전 자세를 유지했다.
2. 4. 죽음
1574년 구루리 성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68세였다.3. 인물 및 일화
- "오공(五公)"이라는 두 글자를 인문(印文)으로 한 인판(印判)을 사용했다. 오공은 오관(五官), 공(公)은 관아(官衙)를 의미하며, 다섯 가지 공의(公儀)를 행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 전통적인 가마쿠라 체제를 유지하기를 바라며, 입도명(入道名) "정오(正五)"를 사용했다.[10]
- 1545년 아와(安房)의 쓰루가야하치만구 신사에서 자신을 "부장군"(혹은 간토 관령을 의미)이라 칭하며 원문(願文)을 봉납했고, 후호죠씨와 간토의 패권을 놓고 계속 싸웠다. 호죠 우지야스는 기요타카가 숭배하는 승려 닛가를 통해 화의를 제안한 적이 있지만, 기요타카는 상인(上人, 닛가)의 제안조차 거절했다.
- 기요타카의 "요(堯)"라는 글자는 고대 중국 삼황오제 중 한 명인 요(堯)에서 유래했으며, 아들에게도 기슌(義舜)이라는 이름을 지었다(순(舜)에서 유래). 이를 통해 기요타카는 고사(故事)에 근거한 통치를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만년 군주님"으로 존경받았음을 알 수 있다.
- 기요타카의 인품과 용기는 적이었던 후호죠씨에게도 인정받아 "인자(仁者)는 반드시 용감하다(必ず勇あり)"라고 칭송받았다고 한다(『호조 5대기』).
4. 가신
- 정목시시게
- 정목헌시
- 정목시다다
- 정목시미치
- 정목라이타다
- 도키 다메요리
- 사카이 도시후사
- 아키모토 요시히사
- 안자이 지쓰모토
- 다가 다카아키
- 가토 노부카게
등
참조
[1]
웹사이트
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里見義堯」の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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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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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Kōno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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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gawa city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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足利義明の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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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uri Ca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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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湾観光情報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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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城がわかる事典「久留里城」の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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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見氏歴代経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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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서
里見氏の宗門である曹洞宗による。また、これとは別に義堯が庇護を与えた[[富士門流]]の日我が生前に義堯の許しを得て、自らの[[血脈相承]]の門人として「唯我」の法号を贈っている。
[8]
논문
『彦部家譜』所収里見氏関係文書
[9]
서적
北条氏康の房総侵攻とその制約
戒光祥出版
[10]
논문
里見義尭の入道名「正五」と「五公」印文の意義について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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